2014년 4월 룩셈부르크 행위 예술가

드보라 드 로베르티스
Deborah-De Robertis는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한 미술작품 앞에 다리를 벌려 앉아

자기 신체 주요부위를 관람객들에게 보여주는 

퍼포먼스
performance를 함










드보라는 스스로 <기원의 거울>이라 이름 붙인

이 퍼포먼스를 한 이유로


“여성의 성기를 그리는 것은 예술인데, 보여주는 것은 왜

외설이냐?” 
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였다고 










오르세 미술관 측은 드보라의 이런 행위를 즉각 제지하였고

“예술이냐? 외설이냐? 문제가 아니라

미술관 규칙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의 문제이다”라고

제지이유를 설명하게 됨







이런 엽기적 퍼포먼스를 기획해 미술계를 도발하게 한 예술 작품은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1866년 그린 <세상의 기원> 때문 임







<세상의 기원_L’ Origine du monde 1866 오르세미술관>

“세상의 모든 것이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그림은 처음 공개 될때 사회적 파장이 너무 커

그려진 후 100년이 넘도록 공개되지 못하다가 1988년에야 비로소 

오르세 미술관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공개 되었음












오늘은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브 쿠르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함









사실주의_Realism




“상상력에 따른 이상화(理想化)를 거부하고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자세히 관찰한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귀족들과 부르주아에게서 권력을 되찾아

절대왕정_Bourbon을 세우기 위해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22km 떨어진 베르샤유에 새로운 궁전을 신축하게 됨










바로크 양식으로 신축된 화려한 새 궁전의 내부를

더욱 화려하게 치장해 줄 장식품들이 필요했고

남성적 바로크Baroque미술과 여성적 로코코Rococo 미술

그렇게 프랑스에서 싹트게 되었음









<사비네 여인의 겁탈_The Rape of the Sabine Women 1634-5 니콜라푸생>


바로크 미술은 이탈리아에서 먼저 시작되었지만

루이14세는 절대왕정 권위를 바로 세우기 위해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를 설립하였고









<자화상_ 1650, 니콜라 푸생>


고전주의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후원해

절대왕정을 빛내줄 프랑스 바로크 미술을 발전시켜 나가게 함









<그네_The Swing 1767,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루이 14세가 사망 하자 그 동안 절대왕권에 숨죽여 오던

귀족과 부르주아들은 베르샤유 궁에서 보았던 화려함을

자신의 집으로 옮기려 노력 하였고 로코코 미술

이런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문화 욕구를 채우며

귀족문화로 자리매김 하게 됨









<랑부이에 후작부인과 최초의 살롱인 랑부이에 저택>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집을 화려하게 꾸미기

시작했고 그 수요를 채우기 위해 미술 시장 <살롱>이 탄생 함










살롱을 중심으로 미술시장은 비약적으로 커져 갔지만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로코코 미술은 시들해져 가게 되어 버리고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_Le Sacre de Napoléon 1805-7 자크 루이 다비드>


미술의 유행은 르네상스 때로 돌아가고자 하는 신고전주의

작가의 감정, 상상력을 드러내는 낭만주의로 변화하게 됨



이전까지의 미술은 신화, 성스러운 종교화, 역사 이야기

주로 다루었고

왕족, 귀족, 부르주아 특권층 만의 전유물 이였음








미술을 포함한 예술은

예술을 접하고 예술가를 후원하는 후원자의 입맛에 따라

그들이 원하는 방향에서만 존재했고

화가들은 그 후원과 지원 속에서 안정적으로 창작할 수 있었음










19세기 시작된 산업혁명은 미술계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만듬

미술시장이 대중화 되어 화가들을 후원자로부터

자유로워 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카메라의 출현은 미술의 대중적 관심을 사진으로 옮겨가게 해

많은 초상 화가들의 밥벌이를 위협하기에 이르게 됨  










더이상 후원을 기대할 수 없게된 화가들은 

퐁텐블로 외곽 바르비종
Barbizon 에서 모여 살며


"실내 아틀리에’에서 그리던 고전적이고 낭만적 자연이 아닌

자연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해 그리게 되면서,,,








<이삭줍기_Des glaneuses 1857 Millet>


자연주의Naturalism는 이렇게 시작됨








<삼등열차_The Third-Class Carraige 1862, 호노레도미에>


쿠르베는 도미에Honore Daumier등과 함께

이전 미술 인위성을 거부하며


"미적 대상은 현실과 왜곡된 것이 아닌 평범한

일반 시민들의 모습과 가치관을 보이는 그대로 정직하게 옮기는 것” 



으로 규정하며 자연주의에 심취, 열중하면서

자연주의 바탕에서 사실주의Realism는 싹티우게 됨





“자기가 속하는 시대의 풍속, 관념, 현실을 본대로 그린다”









구스타브 쿠르베_Gustave Courbet(1819~1877)








<〈샘〉_La_Source_1868>



“나에게 천사를 데려오면 천사를 그려 주겠다”

“내가 보지 않은 것을 절대로 그릴 수 없다”











구스타브 쿠르베는 1819년 6월 10일 부르고뉴 프랑슈콩테와 지방

오르낭의 부농인 아버지 엘레오노르 레지와 어머니 질리 쿠르베의

사이에서 태어났음
 








<질리 쿠르베_Zélie_Courbet 1853>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도가 되기 위해 왕립고등학교

입학하지만 쿠르베는 그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됨


부모의 전폭적 지원속에 화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온 쿠르베는

루브르 박물관 그림들을 모사하면서 그림을 연구 하기 시작했고

스페인파, 네덜란드파, 베네치아파 등을 공부하며


특히 <렘브란트>의 그림에 푹 빠지게 됨









<검은 사냥개와 쿠르베_Courbet au chien noir’ 1842>


쿠르베가 23세 되던 1842년에 그린 이 자화상을 1844년 왕립

아카데미 후원 프랑스 미술가 전시회 ‘르 살롱_Le Salon’ 전

출품해 입선하게 되면서 쿠르베는 미술계에 등단 하게되었음
 








<프루동과 아이들_Proudhon-children 1865>


미술계에 등단한 쿠르베는 시인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사회주의자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 평론가 뒤랑티 

당대 지식인, 철학자, 평론가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인정받았고 비평가와 대중들에게도

서서히 각인되기 시작함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_ 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1830, 외젠 들라크루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이상을 거부하는 것이며
이상을 거부하는 것은
개인을 해방하는 것이고
결국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것이다
리얼리즘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 미술이다”








<참회하는 막달레나_The Penitent Magdalen 1640, 조르주 드 라 투르>


"루이 13세의 궁정화가로 부와 명예를 같이 얻은
조르주   투르Georges de La Tour
고향에서 민심을 잃어
그의 가족 모두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돌 깨는 사람들_ 1849>


이상화로 만들어진 이야기 보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 담백한 이야기가

때로는 사람들에게 더 큰 감동을 전해 주기도 한다









<오르낭의 매장_Burial at Ormans 1849>

 “내가 노력하는 것은 전통의 온전한 지식으로부터 나 자신의
독립성과 나만의 개성을 합리적인 감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림에 사용된 물감이 아깝다”라고 사람들은 말들 하지만
나는 존재하는 사람들을 그림 안에 존재시켜 현실을 기록한다




1850년 파리살롱에 공개된 <오르망의 매장>은 비평가들에게

“그릴 이유가 없는 그림이다” “추하다” “황당하다”라는

비평을 받게 됨



<오르낭의 매장>은 쿠르베의 고향 오르낭에서 있었던

한 농부의 장례식을 배경으로 한 작품 임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이상화된 숭고하고 영적인 의미의

그림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리하며 화폭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결같이 평범하게 삶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음 









쿠르베는 이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인물들을 실물 크기로
그렸내었다" 


이 작품은 기존의 전통 역사화의 경향을 소박하고 진실성이 담겨진
사실의 재현으로 신과 영웅들의 전유물이었던 존엄성을
40여명이 넘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부여하였다 









<샤를 보들레르의 초상 1848-9>



쿠르베는 1949년 살롱전에 11점을 출품해 그 중 7점이

전시되는 영예를 얻으며 미술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됨


쿠르베는 당대의 예술가 중 오직 자신만이 대중의 생각과 감정

표현해 낼 수 있다고 주장 하기 시작 함
 

그리고 그것은 곧 본질적으로는 가장 민주적이다라고 단언하며

대중을 향해 계몽적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기에 이름









<Louis Guéymard as Robert le Diable  Louis Guéymard, 1857>



쿠르베는 오직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였음


그는 일상에 널 부러진 모든 장소와 사물들만을

진실되게 그려야 한다고 믿었음









<목욕하는 여자들_The Bathers 1853>


그림 속 한 여인은 아름답지 않은 풍만한 몸을 반쯤 드러낸 채
목욕을 막 시작하려 하는 모습이고
또 다른 여인은 그녀를 돕는 하녀인듯 하다




쿠르베는 1853년 이 그림을 ‘르 살롱’에 출품 하였음


프랑스 낭만주의 대가 외젠 들라크루아Delacroix

‘벗은 부르주아의 살찐 몸뚱아리와 엉덩이의 의미 없는 몸짓’이라고

혹평을 하였지만 그 평가 덕에 그림은 유명세를 타게 되어

고가에 판매 되었다고 함








<안녕하세요 쿠르베씨_The Meeting or Bonjour Monsieur Courbet 1854>


미술도구를 가득 맨 쿠르베는 들판 한복판에서 자신의 후원자인
알프레드 브뤼야스Alfred Bruyas를 만났다


화가와 후원자의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가 분명하겠지만
그림 속 쿠르베는 브뤼야스에게 매우 뻣뻣한 모습이다


오히려 브뤼야스와 그의 하인이 모자를 벗고
예의를 지키는 분위기이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농부들_Farmers of Flagey on the Return From the Market, 1850>


“이전 예술이 주는 환상과 허구를 벗겨 내고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을 내세웠다”










파리 국제박람회_Paris Exposition Universelle












1855 파리에서 국제박람회가 개최되었음

쿠르베는 자신의 그림을 세계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싶었지만

그의 그림들은 박람회 주최로 부터 전시를 거부당하게 됨









<알프레드 부뤼야스_Portrait of Alfred Bruyas, 1854>


그러나 쿠르베의 후원자인 알프레드 브뤼야스의 도움으로

박람회 맞은편에 전시장을 빌려 개인전을 열수 있었음









<화가의 아뜰리에_ L`Atelier du peintre 1855>


“예술가로서의 나의 7년을 담은 자서전과 같은 작품이다 
이 그림을 통해 현재 프랑스가 처한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나는 이 전시회를 리얼리즘_Realism이라 이름 붙혔다”



쿠르베 자신과 여성모델, 어린이를 캔버스 중앙에 두고

오른쪽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철학가, 작가, 시인 들을 그려 냄


그리고 왼쪽엔 일상 속 평범한 사람들을 그려 놓음으로

개혁에 실패한 프랑스 계급사회를 비판하고자 하였다고 함










쿠르베는 관능미가 살아 있는 누드화를 통해 여성미를 강조했음

여성들의 삶을 꾸미지 않고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 여성이

섹슈얼리티의 대상이 아닌 평범한 인격임을 나타내고자 하였음








<하얀 스타킹을 신는 여인_ La femme aux bas blancs 1861> 


과거에 없던 독특한 구도의 그림 속 여인은
전혀 고상해 보이지 않는다


상념에 젖은 듯 허공을 응시하는 여인은 몸을 팔아
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매춘부
 이다









<기대 누운 누드_ Femme nue couchee 1862>


“전형적 누드화처럼 보이지만 여성 모델의 다리에는 하얀 스타킹과
구두가 신겨져 있고 한쪽으로 반쯤 내려간 스타킹은
아름답다기 보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 살갗은 피부 밑 핏줄이 보일 정도로
사실적
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헝가리 컬렉터 ‘페랭 하트바니’의 소장 작품으로

부다페스트 은행 금고에 있었던 것을 1945년 2차세계대전 중

러시아 군에 의해 약탈되었다가 2007년 파리 그랑팔라스에서

전시되며 첫 공개 되었다고 함



2015년 11월 9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560만달러(약 165억원)에 낙찰되어

쿠르베 작품들 중 최고가를 기록했음









<아름다운 아일랜드 소녀 조_  1866>


긴 웨이브 머리의 여성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오른손엔 손거울을 들고 왼손으론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다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희고 볼은 빨갛게 상기되었다
조금은 지쳐 보이기도 하고 긴 생각에 잠긴 것도 같다



모델인 조애나 히퍼넌이란 아일랜드 여성은 <조>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녀는 사실 쿠르베의 동료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모델이자 오랜 연인이었다

가난한 이민자의 딸이었던 그녀 역시 화가였지만
생계를 위해 모델이 되기도 했다

당시 사회 통념상 특히 누드모델은 창녀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기에
휘슬러의 가족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그림은 세 사람이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함께 지낼 때

그려졌다고 하며


쿠르베가 가장 아끼던 초상화이기도 했다고 함









<노르망디 해안_ Sea Coast in Normandy 1867>


당시 쿠르베는 47세, 휘슬러는 32세, 조는 23세로

쿠르베에 비해 나이 차가 많았지만

이들은 서로를 신뢰하며 깊은 우정을 나눴다고 함 



쿠르베는 붉고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조의 매력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거의 똑같은 그림을 네 점이나 그렸음 


특히 이 그림은 쿠르베 자신이 소장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평생 누구에게도 팔지 않았다고 함








거울을 본다는 건 자신을 응시하는 행위다
쿠르베는 조가 거울을 보며 스스로 얼마나 매력적인 여성인지
자각하길 바랐던 걸까 아니면 그녀의 소소한 일상마저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노르망디에서 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는 이듬해 파리로 가서 쿠르베의 논란 많은 누드화
<세상의 기원>의 모델이 된다

변치 않는 우정은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은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이후 조와 휘슬러는 연인관계를 청산했다









<잠_ Le Sommeil 1866>


여성 동성애는 시대를 불문하고 금기 시 되었던 주제였다

그런데 나는 신화나 전설을 빌려 오지 않고
그냥 보이는 데로 적나라하게 그렸다


두 여인의 미묘하게 다른 살갗 피부색은 만져보고 싶을 만큼
투명하게 관객에게 전달 된다




잠에 빠져 엉겨 있는 두 여인은 분명 레즈비언 커플임

흐트러진 머리, 침대 위에 떨어진 장신구는 두 여인이

지금 막 열정적 사랑을 끝냈음을 알려 주고 있음


쿠르베는 이 작품을 대중들에게 공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 정도로

대담하게 동성애를 표현했음 


당시 미술애호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주제가 누드화였지만,

현실 속 여성의 누드를 표현하면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음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에로틱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화가들은 역사 속 인물이나 신화의 내용을 빌려와

표현 해야만 했음 










파리 코뮌_La Commune de Paris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파이프를 물고있는 남자_L’homme a lapipe Man with a pipe 1848-9>



쿠르베는 자신을 ‘타고난 공산주의자’라고 선언 할 만큼

사회주의를 찬양했음










노동의 권리를 주장하며 일어난 1848년 2월 혁명은 쿠르베에게

이상적 국가 건설의 꿈과 같았다고 함



2월 혁명이 실패하면서 일상을 사는 서민들과 노동자들은

하루를 견뎌 살아가는데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되었고

쿠르베는 그런 상황을 외면하는 정치인들에게 불만을 갖게 됨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하면서 제2제정이 무너지자

제3공화정이 선포 됨




1871년 3월 18일 파리코뮌_혁명정부가 수립되며 나폴레옹 3세에게

충성하는 베르사유군 및 독일군과 싸울 것을 다짐하게 됨




파리 코뮌은 베르사유군이 프로이센군과 휴전 조약을 맺은 것을

불명예스럽게 받아들였고 당시 미술가 동맹 회장이던 쿠르베는

‘코민 평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지나치게 참여 하며

코뮌의 혁명 활동에 적극 가담하게 됨









코뮌이 정권을 장악하자 주동자들은 방돔 광장

나폴레옹 1세 방돔탑을 철거 해버림










1871년 5월 28일 베르사유군에게 파리 코뮌은 진압되었고

코뮌을 주도하던 주요인사 대부분이 프랑스 외로 망명하게 됨 



6월 7일 파리에 남아있던 쿠르베는 친구 집에서 체포 되었음









곧 군사재판이 열리며 쿠르베에게 비난의 화살들이 쏟아졌고

6개월의 형을 선고 받은 쿠르베는 생트펠라지 감옥에

투옥되는 치욕을 겪게 됨




새 정권은 나폴레옹 1세 방돔탑을 다시 만들기로 했고

금화 50프랑에 이르는 막대한 비용을 쿠르베에게 청구하게 됨









<오르낭에서 저녁식사 후 1849>


쿠르베는 파산을 면하기 어려워지자 1873년 7월 23일 스위스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고 ‘플뢰리에’라는 작은 도시에 정착하게 됨









<쥐라산맥_Stream in the Jura Mountains 1872-3>


“풍경화를 간단하게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풍경을 그리는 사람들이 과연 그 풍경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그리는가" 




그러다 프랑스와 거리가 먼 ‘라투르드펠즈’로 거쳐를 옮긴 쿠르베는

봉포르라는 낡은 모텔을 구입해 그 곳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남은 일생을 살다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 함









<뉴샤틀 호수_The Lake Neuchâtel, 1875>




쿠르베는 죽을 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함

“내가 죽거든 자유의 규칙 외에는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았다고 말하라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공화주의자,
혁명이 의미하는 모든 것의 지지자이고 무엇보다도 우선

나는 리얼리스트이다”










에필로그









<절망적인 남자_The Desperate Man 1844-45>


쿠르베의 이 자화상은 영국 가디언The Guardian지가 뽑은

‘정신나간 미술 베스트 10’

고흐 <귀를 자른 자화상>과 함께 뽑히기도 했음





쿠르베는 사실주의 화가였지만 자신의 자화상은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았음



쿠르베가 “사실”이라고 말하는 “Realism”은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실적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꾸미지 않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함









<파도와 여인_The Woman with Wave 1868>


사실주의적 표현은 화가들이 후원자들의 영향력에서 벋어나

자신의 사상과 예술 철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런 예술 풍조 변화는 인상주의로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음







TIP. 사실주의 미술과 사진



사진이 발명되기 이전 회화에서는 <카메라 옵스큐라>라는

보조 기구를 데생에 사용했음









카메라 옵스큐라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장치로 화가들은

이 기구를 이용해 조그만 구멍이나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광선을

거울에 반사시켜 유리에 맺히는 상을 그대로 옮겨 그리곤 했음









이 같은 표현은 사실주의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사실주의 화가들이 주창했던 ‘구체적 예술,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

에대한 관심이 1827년경 루이 자끄망테 다게르에 의해 고안된

다게레오 타입 사진기가 발명되면서 더욱 고조된 것임


그리고 사진이 현대 생활의 실상을 표현해 내는 예술 매체로

정착하기까지는 쿠르베와 같은 사실주의 화가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것은 부정 할 수 없겠음








<가르강튀아_Gargantua 판화, 도미에 1831>



쿠르베의 작품은 이후 스냅사진의 효시가 되었고

도미에의 풍자화는 보도사진의 표본처럼 여겨지게 되었음


사실주의 회화와 사진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를 표현해낸다>

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실주의 작품은 현실을 단순하게 재현에 그치지 않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철학적 목적이 있었음










구스타브 쿠르베가 살던 시대는 프랑스 혁명 이후 왕권파와

공화정의 치열한 권력싸움이 있던 시기였음


계몽주의사상이 전 유럽을 휩쓸던 때이고 칼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1847 <공산주의자 동맹>을 설립하며 세력을 확대하던

시기이기도 했음


계몽주의로 개인적 인간 삶에 눈을 뜨던 대중에게 산업혁명 이후

부를 쌓는 자본가는 빈부갈등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었음


분노한 대중에게 공산주의-사회주의는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향 처럼 보였을 것임


그러나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

공산주의의 국가 이상은 1991년 소련의 붕괴와

북한의 경제위기로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미 증명되었음









150여년 전 프랑스에서 휘몰아 치던 이념의 계급 갈등이

대중을 선동하는 한줌의 조무래기들에 의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 글을 써봄









문화예술인은 자기분야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150여년 전 구스타브 쿠르베는 본인의 삶으로

2021년의 우리들에게 잘 증명해 보이고 있음


지금도 국민을 선동하려는 많은 연예인들의 미래모습이

쿠르베와 다르지 않을것 임..
 





오늘도 긴글 끝까지 읽어 주어 감사드림. THE END







세줄요약

1. 구스타브 쿠르베는 재능 있는 화가였음

2. 누드화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임 

3. 선동의 재료로 쓰이다 버림 받고 불행한 말년을 보내다 디짐



 

by 밑바닥에서 글로벌로~ 발전소장 에르 :) 2021. 3. 2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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